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.
항상 밝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신비한 아이.
흑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소녀.
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다.
밝은 아이로 있고 싶어서 밝게 지낸 건 아니다.
그렇게 대했을 때 인간 관계가 가장 편했을 뿐이다.
딱히 신비주의를 고집한 적도 없다.
다른 사람과 깊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뿐이니까.
태생적으로 이렇게 태어난 건지, 크면서 뭔가 잘못 먹은 건지 모르겠지만
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서툴다는 것 같다.
초등학교 때만 해도 주변 친구들이 갑자기 깔깔 웃어대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
한겨울 학기가 끝나는 날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.
감정을 느낄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만, 그런 걸 느낄 여유가 충분하지도 않았다.
어머니는 항상 엄하셨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매번 해외에 계셨으니까.
친구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나마 함께 노는 것도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.
어린 소녀가 의지할 데는 가끔 찾아오시는 자상한 할아버지와 책뿐이었다.
어렸을 땐 정말 책을 좋아했다.
책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나는 활자의 바다에 잠겨 마음껏 유영했다.
그 바닷속이 저마다 다른 색채를 띠고 모두 다른 세상을 보여주면서 내 마음을 홀린 것도 있었지만,
무채색의 나날을 잊을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겠지.
그중에서도 특별히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.
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.
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웅의 이야기라든가, 지평선 너머까지 볼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나
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소년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나를 빠져들게 했고, 내가 동경하게 했다.
뭐,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바보 같은 이야기들이었지만.
세상에 그런 비현실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?
게다가 초등학교 졸업을 이틀 앞둔 날 할아버지가 떠나시고부터는 자연스레 이런 책들에 손이 가지 않게 되었다.
아무튼, 그렇다고 해서 생활이 딱히 불편하거나 하진 않아.
이해하긴 어렵지만 반응 메커니즘은 대충 알 것 같았고, 조금 머리가 커진 뒤로는 적당히 ‘반응’하면서 지냈으니까.
그때부턴 주변 아이들과의 관계도 훨씬 원만해진 것 같다.
그래, 주변에서 조금 예쁘다는 칭찬을 듣긴 했어도
단조롭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었는데.
분명 그랬었는데…
……
“─괜찮으세요?”
잠깐잠깐, 뭐야?
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?
분명 나는 길을 가고 있었는데…
갑자기 괴한이 나타나서 날 밀치고 가방을 가로채 달아나려다가
그래, 눈 앞에서 그대로 바닥에 머리가 박혔지…
어라? 어떻게? 혼자서 그런 거야?
내 앞에 서 있는 건 누구지?
“아~아, 정말 귀찮게 말야…. 어두워졌다고 이딴 짓을 해도 되는 게 아닐 텐데.”
“큿소… 꼬맹이 주제에, 이 자식 뭐 하는 놈이야?”
“많이 화났나 봐, 아저씨? 그치만 그 정도 「칼」은 익숙하단 말이지…”
“급식 주제에 무슨 개소리…… 끄아아악!”
“뭐, 「은유」니까… 보일 리는 없겠지만.”
뭐지, 저 애는?
아무리 그래도 성인 남성을 저렇게 가볍게 제압하다니…
무슨 말을 하는 건지… 아, 저 손에 있는 건…
“이거, 그쪽 거 맞죠?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요.”
“저기요? 무슨 말이라도… 괜찮으신 거 맞아요?”
“……아아! 네! 괘, 괜찮아요…”
“…이거 참, 가만히 있어보세요.”
남자아이는 갑자기 손수건으로…
내 눈가를 닦아주잖아?
응? 어째서…
“이 군, 갑자기 어디로 뛰쳐가는 거야!”
“미안, 셰익스피어… 빨리 경찰 좀 불러줄래?”
“뭐? …아, 알았어.”
어딘가에서 달려온 긴 머리의 여자아이…
나와 남자아이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
쓰러져있는 괴한을 보고 바로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.
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도, 집에 무사히 돌아온 뒤에도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.
아니, 어쩌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.
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저 어두운 골목의 공포, 영웅에 대한 경외, 순간 느껴진 소녀의 붉은 빛 살기, 그리고─
─머리가 아파……
아니, 아프다기보다 이건─
뭐지? 얼굴이 뜨겁고 온몸이 긴장해서……
감기인가… 한겨울밤에 돌아다녔으니 걸렸을 만도 하지……
그날부터 한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.
어머니가 평소와는 다르게 자상하게 도와주시고
아버지도 오랜만에 집에서 요리를 해주셨지만
정작, 내내 떠오른 얼굴은─
어떤 사람이었을까.
분명 멋지고 상냥한 사람이겠지.
옆에 있던 아이는 친구였을까? …연인이었을까?
그 교복… 본 적이 있는데…
강철빛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났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.
학업이 질렸다거나 하는 불량한 이유는 아니었다.
그냥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… 나름대로 알아볼 시간이 필요한 거였으니까.
그보다도, 무언가 새로운 걸 느껴버린 것 같다.
머릿속인지 가슴속인지… 마치 꽉 막혀버린 것 같아.
아니, 가득 들어찼다고 해야 할까?
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어.
그래도 좋아. 문이 닫힌 것보단 열려있는 게 분명 훨씬 낫겠지.
이럴 때 나한테도 이야기 속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.
멀리까지 볼 수 있고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야─
……
역시 첫발을 내딛는 건 언제나 낯설다.
학기 초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복도이지만
나한테는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…
…학년 …반. 몇 층으로 가야하는 거지?
금발에 엄청 귀여운 아이도 있네. 외국에서 온 걸까?
아, 저 애는 분명 그때 옆에서…
후후, 학교는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.
“이렇게 이른 봄에 갑자기 전학생이 올 줄이야!”
“저 녀석, 꽤 먼 곳에서 온 것 같은데?”
“부잣집 아가씨인가? 어이어이, 엄청 귀엽잖아, 저 애….”
음─ 역시 없네.
하긴 이름은커녕 몇 학년인지,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
요행을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겠지.
“만나서 반가워요, 여러분!
이곳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투성이지만,
여러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많이 배우고, 즐겁게 생활하고,
그리고…”
아니, 하마터면 무작정 말을 쏟아낼 뻔했네요.
이런 건 말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…
정말, 역시 알고 싶은 것뿐이라니까요. 너무 들떠버린 걸까요?
이 군, 이라고 했죠?
당신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,
당신과 가까워지기를 깊이 바라면서.
“소개할게요. 제 이름은─”